2024.10.23—2024.11.10
이미주 개인전: 산책 Simply a walk
표류하는걷기
윤율리, 일민미술관책임큐레이터
서울에서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한국 사람들에게 시간은 자연의 본성이라기보다 낭비하지 않아야 할 자원처럼 간주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시간관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유동하는 경험, 실체 없는 이미지가 실재의 자리를 대체하는 경험은 우리가 흔히 동시대적이라 부르는 시간의 경험과 비슷한 일면이 있다. 이러한 삶, 세계가 강박적으로 ‘동시대’에 수렴하는 서울의 삶은 대단히 흥미롭고 고통스럽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일 역시 시대적 환경에 빚을 진다. 이미주는 그림을 그리거나 덩어리를 깎고 더하는 일에서 자신이 포착하는 동시대를 변별하고 복기해 독특한 시각성을 창조하는 작가다. 그가 젊은 한국 여성으로서 겪는 불안정과 혼란은 여행과 이주의 중간점에서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는 경로를 통해 증폭되어왔다. 기이하게도, 서울의 아주 빠른 시간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기를 바란 작가의 여정은 더 안전하고 느린 전통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방법론을 경유해 불가능한 다른 현실을 더듬고 재현하는 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그의 작업은 자신의 여정에서 채취한 모순적인 인식이 서로 동기화하지 못하는 순간에 주목하며, 개별적인 사물과 사건의 기억을 자의적 시각 질서에 따라 캔버스 위의 현실로 불러내는 것이라 요약될 수 있다. 어쩌면 이 마술적인 힘은 모든 순간이 먼지처럼 미세하게 부서진 오늘날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가 주장할 만한 유일한 가능성일지 모른다. 불가능과 불능감을 묘사하는 알레고리로서 작가가 “완벽한 현실(Perfect days)”이라 부르는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일 말이다.
APO 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산책 Simply a Walk》은 언급된 전시 《완벽한 날들》(2024)의 연장에 놓여있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흐름은 ‘프루츠 칵테일’ 연작에 기초해 발전한 두 점의 회화 작품이다. 이미주는 2024년 〈프루츠 칵테일 Fruit Cocktail〉(2024)에서 캔버스 면적 대부분에 과장된 스케일로 강조한 젊은 여성 초상과 신체를 그려 넣고, 동물, 과일, 빵, 꽃과 버섯 같은 도상으로 화면 곳곳을 채웠다.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회화의 인물—그러나 인물이라기에는 명백히 분절된 ‘얼굴’이나 ‘신체’에 가까운 ‘내용’—이 가진 내러티브에는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에게 수면과 수심의 표현은 물이라는 물질로 인해 회화 내부에 촉발해야 마땅한 세계의 변화—공간의 밀도 혹은 압력 차이, 시청각적 굴절과 착란—를 조율하는 그리기 시스템처럼 사용된다. 즉 그가 표현하는 현실은 단순히 이질적인 대상이 어지럽게 산란하는 곳이기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장르, 형태, 해상도가 각축하며 실재의 무게와 환영의 무게를 각기 달리 저울질하는 회화적 장소다. ‘Estanteria’(2024~)와 ‘Escenario’(2023~) 연작이 캐비닛과 같은 시각 기호를 다루었다면 〈Table of the day〉(2023)는 사물과 재현의 관계를 설명하는 미술 장르(정물화)의 상투성을 재료로 썼다. 〈There’s so much of me in me〉(2022)는 근본적으로 회화가 연루될 수밖에 없는 환영을 선반이라는 가짜 그리드로 통제한 시도다.
이미주가 그린 것은 종종 회화 바깥으로 빠져나와 다시 출몰한다. 이번 전시의 나머지 흐름을 구성하는 반(半)회화적 요소다. 2016년 정물화와 오브제를 병치한 이래(〈유희적 정물〉), 회화를 ‘진짜 벽’에서 떼어 공간 속으로 돌출시키거나(〈제작의 미래〉, 2017) 기술적 지지체와 대비되는 ‘지지대’를 회화에 부여한(〈그림의 뒷면〉, 〈덩어리들〉 등, 2018~) 시도가 작가에 의해 지속되었다. 2021년 문화역 서울 284에서 전시한 〈Buddah’s Palm〉은 회화 바깥의 사용법이 디지털 스크린을 포괄하는 대형 설치로 완결된 사례다. 이렇듯 물질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전통 회화가 출력할 수 없는 현실을 의심하는 과정에서 그래픽적인 충동과 맞닥뜨린다. 최근 이미주가 탐색하는 반(半)회화성은 평면의 한계를 의식하는 것에서 나아가 더 명확히 물질을 향해 치닫는다. 긴 털에 뒤덮여 정확한 방향과 시선을 특정하기 힘든 예티는 이전보다 순수한 이물질에 가까워졌다. 라비비(La BIBI)의 전시 《완벽한 날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티 중 하나에 ‘민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민지는 서울이 집착하는 쿨함을 표상하는 아이돌 그룹 뉴진스(New Jeans)의 멤버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여성들에 부여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름”(작가 노트, 2024)이다. 이미주의 세계는 대체로 이런 아이러니와 함께 직조된다. 산책은 그 세계에 이르기 위한 표류의 기술이다.
2024.10.23—2024.11.10
이미주 개인전: 산책 Simply a walk
표류하는걷기
윤율리, 일민미술관책임큐레이터
서울에서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른다. 한국 사람들에게 시간은 자연의 본성이라기보다 낭비하지 않아야 할 자원처럼 간주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시간관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유동하는 경험, 실체 없는 이미지가 실재의 자리를 대체하는 경험은 우리가 흔히 동시대적이라 부르는 시간의 경험과 비슷한 일면이 있다. 이러한 삶, 세계가 강박적으로 ‘동시대’에 수렴하는 서울의 삶은 대단히 흥미롭고 고통스럽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일 역시 시대적 환경에 빚을 진다. 이미주는 그림을 그리거나 덩어리를 깎고 더하는 일에서 자신이 포착하는 동시대를 변별하고 복기해 독특한 시각성을 창조하는 작가다. 그가 젊은 한국 여성으로서 겪는 불안정과 혼란은 여행과 이주의 중간점에서 한국과 스페인을 오가는 경로를 통해 증폭되어왔다. 기이하게도, 서울의 아주 빠른 시간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하기를 바란 작가의 여정은 더 안전하고 느린 전통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방법론을 경유해 불가능한 다른 현실을 더듬고 재현하는 일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그의 작업은 자신의 여정에서 채취한 모순적인 인식이 서로 동기화하지 못하는 순간에 주목하며, 개별적인 사물과 사건의 기억을 자의적 시각 질서에 따라 캔버스 위의 현실로 불러내는 것이라 요약될 수 있다. 어쩌면 이 마술적인 힘은 모든 순간이 먼지처럼 미세하게 부서진 오늘날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가 주장할 만한 유일한 가능성일지 모른다. 불가능과 불능감을 묘사하는 알레고리로서 작가가 “완벽한 현실(Perfect days)”이라 부르는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일 말이다.
APO 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산책 Simply a Walk》은 언급된 전시 《완벽한 날들》(2024)의 연장에 놓여있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흐름은 ‘프루츠 칵테일’ 연작에 기초해 발전한 두 점의 회화 작품이다. 이미주는 2024년 〈프루츠 칵테일 Fruit Cocktail〉(2024)에서 캔버스 면적 대부분에 과장된 스케일로 강조한 젊은 여성 초상과 신체를 그려 넣고, 동물, 과일, 빵, 꽃과 버섯 같은 도상으로 화면 곳곳을 채웠다.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회화의 인물—그러나 인물이라기에는 명백히 분절된 ‘얼굴’이나 ‘신체’에 가까운 ‘내용’—이 가진 내러티브에는 냉담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에게 수면과 수심의 표현은 물이라는 물질로 인해 회화 내부에 촉발해야 마땅한 세계의 변화—공간의 밀도 혹은 압력 차이, 시청각적 굴절과 착란—를 조율하는 그리기 시스템처럼 사용된다. 즉 그가 표현하는 현실은 단순히 이질적인 대상이 어지럽게 산란하는 곳이기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장르, 형태, 해상도가 각축하며 실재의 무게와 환영의 무게를 각기 달리 저울질하는 회화적 장소다. ‘Estanteria’(2024~)와 ‘Escenario’(2023~) 연작이 캐비닛과 같은 시각 기호를 다루었다면 〈Table of the day〉(2023)는 사물과 재현의 관계를 설명하는 미술 장르(정물화)의 상투성을 재료로 썼다. 〈There’s so much of me in me〉(2022)는 근본적으로 회화가 연루될 수밖에 없는 환영을 선반이라는 가짜 그리드로 통제한 시도다.
이미주가 그린 것은 종종 회화 바깥으로 빠져나와 다시 출몰한다. 이번 전시의 나머지 흐름을 구성하는 반(半)회화적 요소다. 2016년 정물화와 오브제를 병치한 이래(〈유희적 정물〉), 회화를 ‘진짜 벽’에서 떼어 공간 속으로 돌출시키거나(〈제작의 미래〉, 2017) 기술적 지지체와 대비되는 ‘지지대’를 회화에 부여한(〈그림의 뒷면〉, 〈덩어리들〉 등, 2018~) 시도가 작가에 의해 지속되었다. 2021년 문화역 서울 284에서 전시한 〈Buddah’s Palm〉은 회화 바깥의 사용법이 디지털 스크린을 포괄하는 대형 설치로 완결된 사례다. 이렇듯 물질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전통 회화가 출력할 수 없는 현실을 의심하는 과정에서 그래픽적인 충동과 맞닥뜨린다. 최근 이미주가 탐색하는 반(半)회화성은 평면의 한계를 의식하는 것에서 나아가 더 명확히 물질을 향해 치닫는다. 긴 털에 뒤덮여 정확한 방향과 시선을 특정하기 힘든 예티는 이전보다 순수한 이물질에 가까워졌다. 라비비(La BIBI)의 전시 《완벽한 날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예티 중 하나에 ‘민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민지는 서울이 집착하는 쿨함을 표상하는 아이돌 그룹 뉴진스(New Jeans)의 멤버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여성들에 부여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름”(작가 노트, 2024)이다. 이미주의 세계는 대체로 이런 아이러니와 함께 직조된다. 산책은 그 세계에 이르기 위한 표류의 기술이다.